지난 2월 말에 발표된 국채교환 제안내용을 보면 53.5%의 채무가 탕감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까지 (민간이 보유한) 채무의 70% 정도를 탕감받아도 자체적인 회생이 어렵다는 주장이 나왔었고 그리스 정부에서도 60% 이상을 탕감받기 위해서 자체적인 협상을 진행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53.5%의 채무탕감은 예상 외의 결과였습니다.
실제 협상 과정에서 흘러나온 정보를 취합해 보면, 최근까지 60% 이상의 헤어컷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고 쿠폰금리만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쿠폰금리를 낮추는 대신, 그리스 경제가 순조롭게 회복되면 일종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왠일인지 헤어컷 비율이 크게 낮아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정부가 헤어컷 비율을 낮추면서 얻어낸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내달 8~11일 국채 교환이 이뤄지면 민간채권단이 보유한 그리스 국채 2천억유로에 대해 명목가치 기준으로 53.5%가 탕감된다. 약 33%인 700억유로어치는 30년 만기 장기채권으로 교환되고 남은 15%인 300억유로어치는 현금지급된다.(연합뉴스, 2012.02.21)
채권 교환에 응한 투자자들은 기존 채권 액면가의 15%를 만기 2년짜리 새 채권으로 받고 나머지 액면가 31.5%는 새로운 장기 채권으로 받게 된다. 투자자들은 그리스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EU와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제시한 기준을 넘어서면 추가적인 이자 수익도 얻게 된다. (머니투데이, 권성희 특파원, 2012.02.25)
민간채권자들은 헤어컷 비율을 낮추는대신, 현금대신 2년만기 그리스 국채를 받게 된 겁니다. (유럽중앙은행이 그리스 국채투자(?)에서 얻게 될 수익을 그리스가 돌려받는 것은 해당 국채의 만기 이후가 될 테니 현 시점에서 고려대상에서 제외합니다.) 어떻게 보면 기존의 협상 내용을 뒤집는 (그리스 정부의) 제안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민간채권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5일(현지시간)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그리스 정부와 협상을 벌여온 민간 채권단 대표인 국제금융협회(IIF)의 운영위원회 소속 12개 은행과 보험사, 자산운용사, 헤지펀드들이 성명서를 내고 "국채교환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국채교환에 참여 의사를 밝힌 운영위원회 소속 금융기관들은 BNP파리바와 도이체방크, 그리스 내셔널뱅크, 알리안츠, 코메르츠방크, 크레이록캐피탈매니지먼트 등이다. (중략) 현재 협상 대표였던 IIF에 참여하고 있는 채권단이 전체 국채 보유액의 75%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만큼 나머지 25%를 보유하고 있는 헤지펀드 등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따라 결과가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이데일리, 이정훈 특파원, 2012.03.06)
일단 부정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스 정부는 80 ~ 85% 정도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용부도스와프(CDS) 순잔액이 32억 달러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민간채권자들이 보유한 그리스 국채규모가 2060억 유로라는 점을 감안하면 1% 정도에 불과합니다. 왜 (25% 가량의) 다른 민간채권자들은 쉽사리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일까요?
정답은 오직 당사자들만 알고 있겠습니다만, 제가 가지고 있는 답을 드린다면, 그리스가 디폴트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 정부는 구제금융 이외에는 자금을 확보할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국채교환시 주기로 했던 현금은 구제금융으로 제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3월 20일에 144억 유로의 만기국채를 상환(또는 교환)해야 하는데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구제금융을 제때 제공받지 못할 가능성도 보입니다. 따라서 그 대비책으로 현금대신 2년 만기의 "그리스 국채"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유로존에서 구제금융 지급을 미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민간채권자들이 그리스 국채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으로 달았는데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일까요?
그리스에 대한 1300억유로 규모의 2차 구제금융 지원이 결정됐지만 채권단과 그리스간 협약은 오는 4월 그리스 총선까지만 유효할 것이라고 CNBC가 21일(현지시간) 헤지펀드 매니저 데니스 가트먼의 전망을 인용해 보도했다.
가트먼은 1300억유로 지원과 그리스 부채를 국내총생산(GDP)의 120.5%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허리띠도 더 졸라맨다는 현 협약은 달성 가능성이 거의 없다면서 그리스가 총선을 치르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 그리스는 결국 디폴트(채무불이행)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했다. 가트먼은 2020년까지 8년만에 그리스 부채를 GDP의 120.5%로 낮춘다는 발상은 "코미디"라면서 실현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보낸 소식지에서 "모든 당국자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디폴트를 수주일간, 기껏해야 몇달간 늦추는 것이 전부였다"면서 "그리스는 결국 디폴트로 갈 것이지만 아마도 현 정부에서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가트먼은 무엇보다도 최저임금, 의료보장, 연금 대폭 삭감은 그리스 시민들의 저항을 부를 것으로 전망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있는 그리스에서는 현재 여론조사에서 구제금융 협약을 반대하는 좌파 정당들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파이낸셜 뉴스, 송경재, 2012.02.22)
현재 그리스의 과도정부는 신민주당(ND)과 全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민당은 우파, 사회당은 좌파입니다. 그리스는 대한민국처럼 군사독재를 거쳐 민주화되었고 1990년대만 하더라도 좌파와 우파가 거의 50대 50으로 팽팽하게 대립하던 국가입니다. 그런데 이번 4월 조기총선에서 "존재감 없던" 다른 좌파정당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한국으로 예들 들자면,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지지율을 합쳐도 50%가 안 되고 민주노동당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2월 15일에 그리스에서 유럽연합에 제출한 긴축이행 협약서에는 신민당 대표와 사회당 대표의 서명만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좌파 정당대표들은 긴축이행을 반대하는 주장으로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유럽연합에서는 4월 총선 이후에 그리스에서 구제금융 협약을 철회하지 않을까 우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이들 정당의 대표들도 긴축이행 협약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3월 20일에 만기 도래하는 국채만 상환하도록 구제금융을 지원하고 나머지는 총선 이후로 미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바 있습니다.
그리스 구제금융이 계속 연기되는 것은 유로존 국가들이 그리스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감 때문이다. 유로존이 2010년 1100억유로 규모의 1차 구제금융을 제공할 당시 그리스는 재정적자 감축, 경제개혁, 국유자산 매각을 약속했지만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전력이 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그리스를 돕고 싶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돈을 펑펑 쏟아부을 수는 없다"며 그리스 지원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다. 그는 그리스 정치 상황을 보면 총선 이후 약속한 것들을 이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그리스 지원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쇼이블레 장관은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한다면 유로존이 겪을 어려움은 훨씬 덜할 것"이라며 "유럽은 2년 전보다 디폴트에 더 잘 준비돼 있는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시아경제, 나주석, 2012.02.16)
이런 상황에서 국채교환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요?
채권자가 만기국채의 원리금 상환을 요구하면 그리스 정부는 원리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지급하지 못하면 디폴트에 빠지게 됩니다. 디폴트에 빠지게 되면 원리금 상환을 요구했던 채권자는 당장은 원리금을 지급받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전액을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국채교환에 참여한 채권자와 동일한 시점에 또는 그 이전에 돈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국채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일단 53.5% 헤어컷이 적용된 국채를 보유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디폴트 이후에 받게 되는 돈도 그 만큼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심정적으로는 원래의 원리금에 비례하도록 보상을 받도록 조치하는게 맞겠지만, 냉혹한 국제금융시장에서 그런 호의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강제적인 채무재조정"과 "자발적인 채무재조정"은 분명 다른 대접을 받을 겁니다.
그리스 정부로서는 유로존 재무장관 전화회의가 열리는 3월 9일 이전에 채무재조정을 마무리하고 싶겠지만, 아직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국채의 경우, 채권자 입장에서 봐도 서두를 필요가 없고 그리스 정부에서도 강제로 교환하기 어렵습니다.
애초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랬다면, 적절한 유인책을 제시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신청하면 국채교환시 현금 비율을 높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저라면, 자발적인 참여로 인한 "상대적인" 이득이 없고 현금이 아닌 "새로운" 국채로 교환하는 조건이라면, 일단 보유한 국채의 만기 때까지 기다리고 보겠습니다.
4월 총선 이후에 총리를 비롯한 정부 각료가 교체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니 어떻게 보면 그리스 정부 입장에서도 딱히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이번에 과반 의석을 차지하게 될 군소정당들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긴축안을 이행하겠다고 서명한 사회당과 신민주당을 역적(?)으로 몰고 파판드레우 가문을 비롯한 명망놓은 정치가문을 몰락시킨다면 이번 총선 뿐만 아니라 차기 총선에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그리스 정치가문으로는 크게 3개 가문 - 파판드레우, 카라만리스, 미초타키스 - 이 손꼽히는데, 한국을 예로 들자면, 90년대의 3김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설명이 길어졌는데,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는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면 디폴트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그리스 정치상황이 유로존의 구제금융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4월 총선 이후에 새로운 그리스 정부가 구제금융 협약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아 그리스의 디폴트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舊)국채를 현금이 아닌 신(新)국채로 교환한다면 국채교환 프로그램에 "만기 이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간채권자들의 국채교환은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이니 그리스 정부가 현금을 확보하는 것도 그만큼 늦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이 유로존에도 좋고 그리스에도 좋다는 주장이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그리스의 디폴트를 배제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디폴트에 빠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4월까지 그리스 문제가 증시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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