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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뉴스

아시아 또 채무위기...1997년 악몽 재현되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돈 풀기 정책에 힘입어 신용대출로 경제를 떠받쳐온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1990년대 말 불거진 아시아 외환위기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확산되자 천문학적인 자금을 풀어 경기를 부양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수요가 줄면서 중국의 성장세는 급격히 둔화됐고 중국의 총 부채는 GDP(국내총생산)의 200%를 넘어섰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수출 없이 중앙은행들이 돈을 푼 결과 가계와 기업들은 막대한 부채 부담을 떠안게 됐다.

이런 가운데 전 세계 자금줄 역할을 해온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양적완화(자산매입) 중단 움직임은 1997-98년 발생한 아시아 외환위기의 재현 우려를 낳고 있다.

케빈 라이 일본 다이와 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양적완화 자금이 아시아 지역에 엄청난 신용 인플레이션 거품을 만들었다"며 "범죄는 이미 저질러졌고 이제 그 후폭풍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양적완화 후폭풍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며 "가계는 그들의 자산을 팔아야 할 것이고 엄청난 부의 붕괴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08년 이후 아시아 지역의 신용은 급증했고 그 결과 주택가격이 치솟았다. 기업간 대형 M&A(인수합병)도 성행했다. 일례로 태국에서는 지난 4월 사상 최대 규모의 M&A와 기업공개(IPO)가 동시에 이뤄졌다.

하지만 외국에서 신흥국으로 향했던 자금 흐름이 역전되자 전문가들은 아시아에서 1990년대 말 경험한 외환 및 신용위기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최근 이런 우려는 주로 최악의 경상수지 적자 행진 속에 통화 가치 및 주가 급락으로 고전하고 있는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집중됐다. 하지만 아시아 최대 성장엔진인 중국의 성장세 둔화와 맞물려 아시아 전역에 걸쳐 위기 전염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HSBC에 따르면 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9년 55%에서 현재 80%로 치솟았다. GDP 대비 총 부채 비율은 180%나 된다. 태국 경제는 지난 2분기에 이미 기술적 경기침체 국면에 진입했다.

석유 부국 말레이시아도 주택시장이 호황을 누리는 동안 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부채가 급증했다. 지난 10년간 흑자 행진했던 무역수지는 올해 적자로 돌아설 전망이다.

태국 역시 원자재 가격 하락 여파로 최근 1996년 이후 최악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프레드릭 노이먼 HSBC 수석 아시아 이코노미스트는 "아시아는 앞으로 2년간 성장 정체기로 접어들 것"이라며 아시아가 대출의 힘으로 성장하는 시대는 이제 끝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시아가 지금까지는 (성장률 상승 탄력이 극대화되는) 스위트 스폿(sweet spot)에 있었지만 이젠 끝나가고 있다"며 "아시아 각국은 레버리지(차입)를 통해 성장세를 사는 쉬운 방법을 택했지만, 그 시간을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데 썼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FT는 아시아의 신용강도(credit intensity)가 급격히 커진 데 주목했다. 신용강도는 경제성장 1단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채의 양을 의미하는데, 홍콩의 경우 2007년 이후 신용강도가 거의 3배 커졌고 싱가포르는 4배 넘게 커졌다.

지미 고 유나이티드오버시뱅크 경제재무 리서치 부문 책임자는 "아시아에서 새로 발생한 신용의 상당 부분이 생산성이 낮은 주택시장 같은 곳으로 흘러들어 경제시스템 전반에 새로운 가치를 더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신용이 급격히 느는 가운데 성장세는 떨어지는 상황이라 정책당국의 대응 여지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인도와 인도네시아가 자국 화폐가치 급락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 등 대응에 나섰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다.

이에 대해 라이는 "선택의 여지는 통화가치와 성장세 가운데 하나만 택해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며 "결코 쉬운 길은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