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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뉴스

경기는 얼어붙어 가는데 세계 증시만 '이상고온'

"왜 이렇게 오르는 거야. 납득이 안 되네."


전 세계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세계 주요국 증시가 연일 오르는 이상(異常) 랠리가 이어지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다.

코스피지수는 지난달 말 이후 10%(170포인트)가량 급등했고, 미국 다우지수도 같은 기간 5%가량 오르며 어느새 금융위기 이후 최고점에 바짝 다가섰다. 브라질 증시가 12%, 영국·인도 증시도 각각 6% 이상 상승하는 등 선진국·신흥국 증시가 동반 상승 랠리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통상 주식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채권 가격은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25일 연 1.43%까지 낮아졌던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가 17일 1.81%까지 올랐는데, 이는 국채 가격이 급락했다는 이야기다. 세계 투자자들 사이에 채권을 비롯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사그라지고 주식을 비롯한 위험자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글로벌 증시의 이상 랠리가 시작된 계기는 지난달 26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말 한마디였다. 그는 전 세계 투자자들이 유럽 재정위기 해법을 갈구하고 있을 당시 "유로화를 지키는 데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돼 있다. 나를 믿어달라"고 호언장담했다. 그 후 구체적인 정책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세계 경제 전망은 계속 나빠지고 있는데도 전 세계 투자자금이 위험자산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는 지금의 증시를 놓고 "미래의 시간을 빌려서 지금의 증시를 살리는 격"이라며 "좋아질 것 없는 세계 경제를 무시하고 증시가 이토록 활황인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①경기와 따로 노는 주가
일반적으로 주가는 경기 전망을 미리 반영해서 움직인다. 이 때문에 앞으로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면 주가가 오르고, 나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면 내린다. 실제로 경기선행지수와 주가는 거의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런데 최근 주가 상승은 이런 상식에 어긋난다. 주요 기관이 한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올 하반기와 내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계속 하향 조정하고 있는데도 주가는 오르고 있다. 그동안 비슷한 궤적을 보였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기선행지수와 코스피도 이달 들어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2개월 뒤의 경기 전망을 나타내는 이 지수는 최근 두 달 연속 하락했다.

실물 경제의 흐름을 매우 정확히 반영해 '구리 박사(Dr. Copper)'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구리 가격도 계속 오르는 주가와는 달리 횡보하고 있다. IBK투자증권 서동필 연구원은 "구리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원자재이기 때문에 경기 회복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사용된다"며 "그동안 주가와 함께 움직였던 구리 가격은 미국 주가 상승 이후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상승장을 '쭉정이 랠리'라고 부르고 있다.


②기업 실적과 무관한 주가
최근 기업 실적 전망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점에서도 최근 글로벌 증시의 상승 랠리는 비상식적이다. 올해 4월까지만 해도 국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순이익이 100조원을 넘길 것이라고 전망하는 증권사들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예상치가 90조원까지 낮아졌다. 해외 기업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2분기 유럽 기업들의 실적이 부진해지면서 올해 주당 순이익에 대한 시장 컨센서스가 지난 1월 8% 증가에서 최근엔 1% 감소로 바뀌었다고 20일 보도했다.


③열기 없는 '차가운 랠리'
주가의 상승은 거래량의 증가를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 상승장은 거래량이 늘지 않는 '냉담한 랠리'라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지난 1월과 2월 상승장 때는 유가증권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대금이 각각 5조4000억원, 6조8000억원에 이르렀지만, 이달 들어서는 4조2000억원에 불과하다.

미국 증시에서도 상승장의 축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WSJ 마켓데이터그룹에 따르면 올해 8월 하루 평균 거래량은 48억8000만주로 지난해 81억7000만주의 60% 수준에 그쳤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일 "이토록 완벽하게 무시당하는 랠리는 처음 봤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애당초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이번 글로벌 증시 랠리가 갑자기 끝나도 그다지 놀랄 게 없다는 게 대부분 전문가들의 견해다.

웰스캐피털매니지먼트 제임스 폴슨 수석투자전략가는 CNBC 인터뷰에서 "투자자들이 휴가에서 돌아오는 9월이면 추세가 뒤집힐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20일 서울 증시에선 애플과의 소송 결과를 우려한 외국인들이 삼성전자 주식을 1115억원이나 순매도해 이번 랠리가 끝물에 도달한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ECB 드라기 총재의 호언대로 EFSF(유럽재정안정기금)의 유럽 재정위기국 국채 직매입 등 유럽 재정위기 해결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가 현실화될 경우 '기대 랠리'가 한층 더 힘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